홀, 편혜영장편

십년 전쯤에 비하여
장편소설이라기엔 책이 얇고 작다.
(이 기기는 글쓰기에 작고 불편)

이졸리어트. 이 작품을 읽은지 네 밤이 지난 지금, 십분만 써보기로 한다.
<홀>이 나한텐 어땠는지. 이졸리어트는 독어로 '고립된'이라는 뜻으로
이글을 쓰기시작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다.

사십대 박사학위소지자이자 선생. 이런 그는
고아였지만 부인을 만나며 가족을 이루고, 살만큼 산다.
정원이 딸린 집도 장만하고.
남자는 어떤 사건으로 장모와 거의 단둘이 연명하게 된다.
그리고 병원과 간병인과 방문마사지사와 누운채로 맞닥뜨린다.
눈을 맞출 수도 통화를 할 수도 없는 부인을 그리워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그리고 장모는...

부모와 남편이 있던, 이제는 죽은 여자. 기자가 되고싶어하던
여자는 작품에서 금방 사라진다.
'고발문'으로 옛 직장에서 재미(글의 위력과 관계있는 재미)를
본 여자는 남편을 고발하는 일을 성공하기 전, 사라져야할
운명이었다. 장모와 남자는 그러나 작품의 끝까지
주거니 받거니 할 일들이 많았다.

사지멀쩡하고 손수 밥법이를 하는 사십대 남자가
장애를 입고 종내 장모에게 사타구니씻김과 폭언을 당하는
이이야기는 뭘까. 진짜 가족이라할 부인과 단절되고
가족도 남도 아닌 (게다가 니혼진인) 장모에게 내맡겨진
'오기'는 또
왜 지리학을, 그중에서도 지도학을 했나.
(이 지점에서 에피파니라는 말은 왜 떠오르나. 내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인데.)


작가는 부부라는 관계, 사위-장모라는 관계를 <홀>에서
다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모녀지간은 이작품에서
있으나마나.

(10분은 애저녁에 지났다)

왜 장모는 어린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고 새엄마를
만나야했을까. 장모의 친모는 왜 일본인이었을까.
오기는 어려서 엄마의 자살을 겪었다. 그 역사는
장모와의 두번째 만남(보호자-'병신' 관계로서의 만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글을 끝내본다.
가족없이 사람은 태어날 수 없다. 일단 태어난 뒤
새로운 가족은 생길 수도 안 생길 수도 있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일과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
'내인생'을 내가 만들고 매일매일 새로 디자인하지 않은 채,
가족만 생각하면 망한다.
스스로는 성실하게 살아내도
'가족구성원의 인생'을 만들지 못하는 어느 가족구성원을 방치한 자는
더욱 호되게 망한다.
편작가의 메시지를 이렇게 되새김질해본다.

mms말고 장편소설이어서 고맙다.





종이달, 종의기원


종 종 이네?

그간 읽은 소설들을 생각해보았다.   
가쿠다 미쓰요가 쓴 '종이달'과 정유정이 쓴 '종의 기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냥 다시 찾아보니 이 두 작가는 한 살 차이)


 유복하게 자라나, 잠시 일한 뒤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 없이 건조하게 살던 여인.
여인은 계약직 은행직원으로 영업을 하며 사건을 일으키고...
'종이달' 이작품은 돈에 대해 알 필요가 없던 이가 돈과 정면으로 조우하며
통째로 변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보여져, 읽으며 감탄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이십대 한국남자의 본능향유기.
이정도로 '종의 기원'을 단순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그냥... 그렇다고.
'7년의 밤'과 '28'도 읽은 나는 '종의 기원'을 두세시간씩 삼일간 읽어치우며
몰입을 했었다. '역시 정작가야...'
 그런뒤 한달 반이 지난 지금, 이제는 좀 더 냉정하게 이 장편소설을 바라본다.
이글을 가능하게 하는 노트북으로부터 일미터 가량 떨어져 소파에서 자는
남의집 하얀개를 보며 마음속으로 이 한권의 작품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읽은 직후에 느낀 감정을 기억해본다.
지금도 각국의 거리를 활보할, 똑똑하고 훈훈한 외모의 살인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정리를 해본다.  이소설은 감정적이다. 너님나님이 사는 이 사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전작들에 비해 많이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패스님의 부모형제친척  몇 명만으로
더 큰 그림을 그릴 능력이 내게는 없을지도.)
 

 돈을 통해 태어나, 반성 없이 달궈지는 욕망과
약점이 있는 자가, 자신보다 더 약한 무언가를 보고 폭발시키는 광기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면서 생각하고 있지만.

ㅅㄱ ㅅㄱ ㅅㄳㄱ


두 작품을 통해
애초에 내가 장편소설을 읽는 이유로 돌아가볼 수 있겠다.






















콜체스터에 사는 테일러씨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몇 년만에 다시 읽었다.
한글판, 독어판 두 권을 굳이 번갈아 읽으려 노력했던 게 벌써 사오년 전.

이책은 여러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랭 드 보통(팀)이
르포르타쥬(?!) 로 엮어낸 것으로 나는 파악하고 있다.

오늘은
비스켓공장 직원, 항공산업 종사자 등 열 개 이하의 직업군-챕터 가운데
화가인 스티븐 테일러씨를 택해 다시 읽었다. <그림>부분인 것.

런던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며, 좀비수준의 시트로앵 차에 장비를 싣고
(썪어가는 샌드위치도 동행)
그림을 그리러 다니는 테일러.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주름살이 많은 백인남자일 것 같은(내추측)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을 그리고 싶었던 적이 없단다.
몇 년 간은 달만, 또 몇 년 간은 외따로선 나무 만을 그렸듯이.
(한동안 타국에서 그림만 그리려 노력했던 나는 그와 성향이 달랐던 듯.)

세상과 동떨어진듯, 그림만 그리며 사는 이사람의 결과물은
은행직원이나 여행자들, 치과의사에게 팔리기는 팔렸다. 
-감상자이자 독자인 나는 이부분에서 안도.

500년 전 그려진 어느 작품을 보고
스스로 빛깔들의 조화를 배운 그는
요즘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책을 덮은지 24시간 즈음 지난 지금,
자신만의 세계에 골몰하며
최소한으로나마 세상과의 접점을 찾고있는 이들을
참으로 오랜만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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